파병에 반대하는 울진군민 910인 선언

우리가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한 청년이 울부짖었습니다. 제발, 제발 그 땅에 있는 한국 군대를 돌려보내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리고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삶이 소중하듯 그 또한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전해지는 그 모습에 가슴 울렁이지 않았을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아마 자신의 목으로 칼이 들이대어지는 상상이 다들 한 번쯤은 절로 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상상. 그 앞에서 그이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였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고, 끝내 그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울진 군청 앞에는 한 사람씩 이어졌습니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지만 전쟁이라는 이 엄청난 괴물에 맞서느라 한 조각 피켓을 가슴에 들고 섰습니다. 어쩌면 처음 시작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우리가 끝내 지켜주지 못한 청년의 죽음 앞에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서 비롯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적이 같은 그 청년 뿐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 수없이 죽어간 이라크 사람들과 미군 병사들의 죽음 앞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금 온 몸으로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누군가부터 홀로 시작된 시위는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그 수는 둘이 되고, 다섯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군청 앞에 붙박고 선 사람들만의 외침이 아니라 이 뜻에 함께 하는 많은 분들이 손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마음 하나를 더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장을 보고 보따리를 한 짐 들고 가다 멈추어 서서 이름을 쓰는 하는 할머니도 있었고, 배가 불러 아기 낳을 날이 가까운 새댁도,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도 있었지요.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가 버스를 세우고 내려 함께 해 주셨고, 막 바로 전역을 하고 예비군 계급장을 달고 나오던 군인도 동참했습니다. 누구는 고인이 죽어가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힘들어했고, 누구는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정권에 대한 원망을 크게 늘어놓았습니다. 또 많은 분들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지만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한 자 한 자 적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보통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바닷가 가까운 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하는, 또는 장에 나와 장사를 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서 군림할 줄만 아는 어떤 이들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고작 내 일터에서 내가 맡은 일을 하고, 내 가까운 식구, 이웃과 더불어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기에도 벅찬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해 남을 해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값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래서 우리는 슬퍼합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죽어간 목숨들을 보면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아파하고, 죽이는 자들의 횡포를 어서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마음은 비단 이곳 울진 군민뿐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바깥 고장에서 오는 소식을 보며 온 나라 곳곳에 촛불을 들고 일어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이들은 대부분 우리처럼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이 땅의 진짜 주인인 들풀로 살아가는 백성들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는 사람들, 남의 목숨을 죽여서 빼앗은 이익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을 뺀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온 나라 고장 곳곳에서, 그리고 이곳 울진에서도 당장 이 전쟁을 그만두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껏 이라크에 들어가 사람들을 죽이고 학대해온 점령군은 지금 당장 떠나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이제라도 끝내도 모자랄 전쟁에, 새로 군대를 보내어 침략군 노릇을 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계획은 반드시 되돌려져야 합니다. 한국 군대가 가는 것은 단지 3600명의 군인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이름으로, ‘한국 국민’의 이름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침략의 길을 우리 국민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웃 나라 사람들을 괴롭혀 빼앗아 오는 이익으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거짓말쟁이들은, 미군이야 몹쓸 짓을 하고 있지만 한국군은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얼마나 야비하고 교활한 거짓말인지 이제는 눈뜨고 있는 자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기막힌 사기극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침략의 당사자인 미국 의회에서조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살박이 어린아이까지 조준 사격으로 죽이는 침략군, 마을 하나를 모두 봉쇄해 놓고 점점 좁혀 들어가며 헬기로 난사를 하는 점령군. 그네들의 모습에는 ‘해방’이나 ‘민주주의’ 같은 말 따위는 없습니다. 전쟁의 실상은 더 감출 수 없이 모두 드러났고, 힘에 못 이겨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도 이제는 모두 군대를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분을 얻기 위해 이웃 나라 백성을 죽이고, 제 나라 백성을 총알받이로 내몰게 하는 이 더러운 전쟁에서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오직 한 나라만이 여전히 미국과의 동맹을 꿋꿋이 지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국민이 죽음 앞에 놓여도, 살려달라고 그토록 애원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라, 그 기막히게 대단한 나라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슬픈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대통령 곁에 있는 누군가는 국민 하나가 죽는다고 파병을 철회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뻔뻔스레 떠들었지요? 또 누군가는 제2의 김선일 씨가 나온다 해도 파병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더니, 대통령의 속내를 잘 아는 어떤 이는 500명 죽을 것을 예상하고 파병을 하는 거라고까지 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마땅치 않아도 잠자코 따르기만 하던 순박한 사람들조차도 전쟁반대와 파병철회의 촛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 촛불들이 온 나라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파병이 철회되는 순간까지 이어질 것이고 온 산과 들을 가득 메울 것입니다. 만일 그래도 파병을 강행하고야 만다면 성난 민심은 더 이상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타오를 민심의 가장 앞자리에 우리 울진 군민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 이 자리에 뜻을 모으고 있는 울진 군민들의 이름과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히 호소합니다. 당장 파병을 철회하고 서희・제마 부대를 되돌아오게 하십시오. 우리가 이라크에 보내야 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평화입니다.